제 작업의 화두는 ‘소녀’와 ‘기억’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 세계를 하나의 특정 공간(twilight room 혹은 toy room)으로 설정하
고,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녀들의 비밀스럽고 생소하고 기이한 모험, 미션, 사랑 등을 표현합니다. 소녀와 함께 하는 상상의 모험의 동반자로는 토끼와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는 소녀의 조력자로서 여행을 돕고 있습니다.

*작업노트 및 작품주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상처가 되어서 여전히 아물지 않아 흉터로 남은 악몽의 기억이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문득 수도꼭지를 틀어놓듯 별안간 쏟아지는 공포의 기억도 있고,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에 시청했던 tv만화처럼 나른한 향수와 그리움을 남기는 기억 등이 있다. 보물처럼 소중해서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나를 지탱시키는가? 뽑아내고 잘라내도 뿔처럼 내 두피를 뚫고 자라는 상처의 기억들이 나를 지탱시키는가? 자주 자문해 본다.

나는 유년시절, 시골길을 잃고 ‘미아’가 된 상태로 낮선 공간에서 낮선 사람들과 불안하게 며칠을 보낸 경험이 있다. 작업을 통해 그 때의 낯설고 공포였던 기억들을 실마리로 해서 일종의 초현실적인 모험 극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다. 볼품없이 남아 있는 흉터에 색을 입혀 타투를 새겨가는 이 과정이 즐겁다.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상처가 되었던 기억들이 꼭 불행만은 아님을, 잠깐 낮에 꾼 꿈일 수도 있음을,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원천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 싶다. 힘없는 소녀(작가 자신)가 이상한 나라(과거의 상실감과상처의 시간들)의 모험 속(그림 속)에서 마법사 같은 활약을 펼쳐 이겨내는 상상 모험극이 작업의 주 모티브이다. 결국은 악몽을 sweet dream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나’이므로……..

이런 기억여행의 동반자로서 원숭이가 등장한다. 인간과 가장 유사하고 영리하고, 재빠르고, 행동력이 있는 원숭이는 소녀를 돕는 조력자이면서 소극적인 소녀를 돕는 행동파로서 소녀의 모험을 가능케 해주는 비서실장의 역할을 한다. 마치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보호하며, 현재의 인도에 있는 뇌음사에 불경을 구하러가는 여정을 돕듯이…. 서유기의 삼정법사 일행이 여행을 통해 ‘깨달음’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깨닫듯이 상실과 아픔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현재의 나에게 있음을 말하고 싶다. 더불어, 그림에 등장하는 토끼는 소녀를 기억여행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특히, 작품 중 ‘a Girl’s Time Trip with a Rabbit’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림에 등장하는 토끼는 소녀를 기억여행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시시때때로 새로운 피를 공급해주면서 여행을 안내한다. 깨진 안경을 낀 소녀는 안내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녀를 인도하는 건 토끼가 아닌 회중시계임을 깨달은 소녀는 토끼를 내친다. 십이지에서 이상세계와 영리함과 꾀를 상징하는 토끼이지만 인간들의 생명공학을 위해 가장 실험대에 오른 희생자의 역할을 했음을 표현한다.

초록 장갑이 걸린 나무(트리)는 과거의 지나온 시간들과 현재의 시간을 상징하는 시간나무이다. 간호사 돼지양은 어울리지 않은 집게발로 소녀의 시간을 단절시키려는 의도로 접근하지만 가운 입은 어느 뭇 남자는 이것을 막아주기 위해 희생한다. 그 결과 그의 손(시간)과 노랑 신발을 빼앗기고 만다.

토끼 옆모습의 형상을 닮은 체크무늬의 로드는 삶의 궤적이자 앞으로 소녀의 남은 시간들이다. 달콤함으로 위장한 해적을 만나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구사일생 건짐을 받을 수도 있고 처참하게 피를 흘리며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노를 저어서 계속 항해를 해야 하는 소녀의 모험 활극을 표현했다.